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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가천대 바람] <바람스페셜 3화> 천세용, 그는 왜 분신을 택했나

안녕하세요!


오늘은 <바람스페셜> 3회를 학우분들에게 소개하려 합니다.

<바람스페셜>은 교내 문제점이나 큰 이슈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바람이 준비한 특별기획 컨텐츠입니다.

지식채널e의 형식을 차용해서 가천대의 4대 이슈를 미니다큐로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총 4부작으로 기획됬고 1주일에 한 편씩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학우 여러분들 모두 저희 가천대가 예전에 경원대학교라는 이름을 썻다는건 잘아실껍니다.

그렇다면 예전 1980~90년대 경원대가 이른바 '운동권'으로 유명했다는 사실도 알고계시나요?


'운동권'이란 [명사] 노동 운동인권 운동학생 운동 따위와 같은 사회 변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의 무리.

를 뜻합니다.


민주화 운동이 매우 활발했던 1980~90년대

경원대에서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나 한 학우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람스페셜> 3회의 주제는

'천세용, 그는 왜 분신을 택했나'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나이 21살, 한창 청춘을 즐길 대학교 2학년 생이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했다는 사실이

학우 여러분들은 믿겨지시나요?


(아래로 내려가시면 91년 당시 교지에 기록된 만화, 추모글, 사고현장사진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91년 경원대 교지 <취경>을 보면

당시 대학생들은 취업, 스펙, 연애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정권을 규탄하고

매일 대자보를 써붙이고 집회에 참석해 투쟁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소위 '운동권' 학생과 그런것을 멀리하는 '비운동권'학생이 나뉘는 경향도 나타났습니다.

당시 사회적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워서 대학도 휴교령이 내려지기 일쑤였고

학생들은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투쟁, 사명, 파쇼, 동지'등의 표현을 자주 썻습니다.


당시 교지에 주변 학우들의 심경을 잘 나타내주는 글이 있어서 옮겨 적어봅니다.



"세용오빠가 분신한 그 날, 오후 집회가 있기전
인문대실에서 대자보를 쓰고 있는데
학생회장님이 무어라 큰 소리를 치셨고
선배 언니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인문대실에 나홀로 남았다
전화벨이 울리고 다급한 목소리가 속보를 써서
대자보화 하라고 내게 일렀다
나는 너무 당황하고 혼란스러워서 무엇을 먼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다짜고짜로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그 날 하루는 정신없이 울면서 뛰어다니기만 했다"
- 심양지, 불어불문 91 

"네가 한줄기 불꽃이 되어 산화한 날,
나는 창조관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단다
한얼 방에서 선배랑 열심히 얘기하던 모습,
기타를 치며 민중가요를 부르던 모습,
가열차게 투쟁하던 모습들이 지금도
경원동산 구석구석 어디엔가 살아있어
어느날 환한 미소로 우리들 앞에 다가올 것 같은 세용아."
- 차영순, 조경 90




이번 화를 제작하며 지금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선배님들이 참 많다는 걸 다시금 느꼇고

지금 저희가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 감사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겠습니다.


다시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로!)








그렇다면 故 천세용 선배님과 당시 1991년 민주화 시위는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요?


1. 1991년 5월 민주화 시위 사건

 1991년 4월 26일부터 같은 해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민주화 시위 사건이다. 공안정국은 노태우 재임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노동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도 점점 심해져 1991년 5월에는 국가보안법과 경찰법 등이 날치기에다 페놀사태수서비리로 국민들의 실망감과 분노가 높아만갔다.

 학생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하였고 이어서 5월 1일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5월 3일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등이 잇따라 분신하여 이른바 '분신정국' 이 조성되었다. 이로 인해 민주화에 소극적이던 노태우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게 되자, 노태우 정권은 5월 8일에 노태우 정권을 비난하며 자살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대필했다는 소위 유서대필사건까지 조작하면서 사건을 덮으려 하였다. 약 60여일 동안 분신 또는 의문사 등으로 총 13명이 사망하였으며, 총 2,361회의 집회가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이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1993년에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며, 노태우와 전두환은 구속 수감되었다.


2. 故 천세용 프로필

- 1971년 5월 서울 출생
- 1990년 서울 동북고 졸업
- 경원대학교 90학번으로 전산과(2부) 입학
- 1990년 3월 경원대힉교 민족사 연구회 ‘한얼’에서 활동
- 1991년 5월 3일 오후 3시경 ‘강경대 학우 폭력 살인자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 도중 분신 후 투신하여 운명(당시 나이 21세)

동지는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해 낮에는 일용직 건설노동자, 세차장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 밤에는 야간강좌를 들으면서도 누구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당시 동지는 강경대 치사사건과 박승희, 김영균 동지의 분신으로 전국적으로 규탄집회가 잇따르는 가운데서도 경원대 학생들이 축제와 체전 분위기에 들떠 집회에 참석하는 수가 점차 줄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동지는 이같이 어려운 학교 상황에서 학생들을 깨우쳐 일으킬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게 되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91년 5월 3일, 동지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4만 학도 결의대회’가 시작되자 국기 게양대 난간에서 신나를 뿌리고 몸에 라이터를 갖다댄 뒤 “6천 경원대 단결 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6m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고 끝없는 민중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산화해갔다. 1985년 10월 21일 새벽 사망, 사망 후 학교에 분향소를 설치하려 했으나, 경찰이 저지함. 경찰의 방해로 장례식과 영결식 없이 안장


아래부터는 91년 교지 스캔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