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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가천대 바람] 할매네

경원프라자 2층에 위치했던 할매네. 

창문이 없는 그곳에서 우린 낮이나 밤이나 똑같은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로 때론 밥을 먹고 때론 술을 먹었다. 그리고 항상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 사람, '할매'. 주문을 하고 난 뒤면 항상 '알았다!'라는 호쾌한 대답으로 주방에서 요리를 해주시던 그 분. 한 후배는 할매네 음식을 먹으면 조미료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배가 아프다고 했고 또 다른 후배는 값만 싸고 맛 없는 이 집을 왜 가냐고 말했다. 그래 때때로 나도 할매네에서 밥을 먹고 난뒤면 나의 연약한 위장을 다스리며 보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5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할매네를 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곳에 가면 우린 손님이 아닌 학생이자 할머니의 아들 딸이었다.

그런 할매집이 어느날 사라졌고, 바람은 다시 그분을 만나러 갔다.





우리가 할매라고 부르는 할머니의 이름은 바로 박경희(71). 

20년 동안 경원대학교 주변에서 종합분식이라는 분식집을 운영하신 바로 그분이다

바람이 인터뷰를 위해 할머니를 찾아 뵌 날은 지난 18

집 근처에 오면 연락 달라고 하신 할머니는 우리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밖에 나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할매가 챙겨준 간식 인터뷰내내 배고프지 않냐고 물어보신 할머니...)

 


소설가가 꿈이었던 고1시절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불행

 

활발한 성격에 친구도 많고 소설가가 꿈이었던 고1 시절, 박경희 할머니에게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온다. 어느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던 것. 처음 다리가 아팠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울다가 땅바닥에 그대로 잠들었다는 할머니. 제대로 걷지 못한 채 절뚝거리는 다리는 할머니의 성격을 내성적으로 바꿔버렸고 할머니는 학교에도 나가지 않은 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매일 자살만 생각하고, 연습까지 하고

 

방 안에 혼자 있는 할머니가 유일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자살’. 할머니는 자살을 생각한 것뿐만 아니라 직접 실행에 옮기기 위해 연습까지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살을 앞두고 죽는 것 보다 뭔가 발전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결정하셨고 고민 끝에 양계장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양계장, 공순이, 미용실, 양장점... 안 해본 일이 없어

 

할머니가 양계장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격하게(?!) 반대했지만 할머니는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300마리 규모의 양계장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양계장을 시작할 때 전국적으로 양계장 붐이 일었고 계란 한 알에 5원까지 떨어지면서 할머니는 집안에 큰 피해만을 남긴채 양계장을 접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양계장이 실패한 뒤 집에서 쫓겨나셨다고 한다. 갈곳이 없어진 할머니는 부산에 있는 고무신 공장에 취직하려고 했지만 다리가 불편한 사실을 면접때 걸려 공장에서 쫓겨나셨다. 결국 할머니가 힘들게 취직한 곳은 구슬공장. 하지만 난생 처음 해보는 야근은 너무나 힘들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쯤 딸을 설득하러 온 아버지를 따라 못 이긴 척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가 다시 시작한 일은 미용실. 할머니의 뛰어난 손재주 덕분에 미용실 장사는 나날이 번창했다. 뭔가 이뤄냈다는 사실이 너무나 즐거웠던 할머니. 할머니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집에서 미용실까지 12km의 거리를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셨다고 한다. 하지만 미용실에서 같이 일하던 직원이 동네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고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미용실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뒤 할머니는 양장점을 잠깐 동안 운영하셨고 얼마 뒤 결혼한다.

 


(박경희 할머니의 약혼식 사진)



남편의 죽음... 그리고 빗물 새는 집

 

하지만 결혼으로 시작된 행복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둘째 딸이 3살이 되던 해 부군이 죽음을 맞게 된 것. 두 딸과 함께 남겨진 할머니는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졌다. 그때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빗물이 새는 집 단 하나. 할머니는 당장 두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태원에서 남의 빨래를 대신 해주는 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빨래를 대신해주고 받는 돈은 빨래 양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당 7000그 돈으로 두 딸을 먹여 살리기 막막했던 할머니는 수소문 끝에 용산경찰서에서 밥 해주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동생이 맺어준 경원대와의 인연

 

용산경찰서에서 밥 해주는 일을 구한 이후로 경제적 어려움은 많이 해소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첫째 딸이 대학을 가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 온다그러던 중 경원대학교에서 호프집(지금 경프 1층 복사집 자리)을 하는 동생이 근처 가게자리를 소개해줬고 퇴직금 300만원과 경찰들이 모아준 50만원을 자본금으로 종합분식을 시작하게 되셨다고 한다. 



(박경희 할머니의 젊은 날)


“20년 장사하면서 가격 올린적은 단 한번

 

학교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본적이 없으신 할머니. 할머니는 아침 8시에 가게로 나가 새벽 4시까지 학생들과 동거동락 하셨다할머니의 손을 거쳐간 학번은 90학번부터 12학번까지. 20년의 세월을 가천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가격을 올린적은 단 한번밖에 없다고 하신다할머니에게 경원대학교 학생들은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세상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할매네 대표메뉴였던 종합떡볶이)


할매네에서 가장 잘 팔린 메뉴는?”

 

그럼 20년 동안 할매네에서 가장 많이 팔린 메뉴는 무엇일까

할머니가 직접 뽑은 가장 많이 팔린 메뉴는 라면덮밥. 그 뒤를 이어 제육덮밥과 순두부, 부대찌개가 잘 팔렸다고 한다. 술안주로 가장 많이 팔린 메뉴는 바로 닭도리탕. 하룻밤에 10~15마리 정도가 팔렸다고 하는데 삼촌네가 생긴 이후로는 판매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할매가 생각하기에 삼촌네 닭도리탕이 잘 팔린 이유는 을 넣어주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할머니는 서비스 안주 인심도 넉넉했다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계란말이에서부터 술국까지 서비스를 줬다고 하신 할머니서비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학생이 왔을 때 마음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신다.


 

할매가 말해준 닭똥집 요리법!


1. 닭똥집을 사와서 소금물에 빡!! 주무르면서 깨끗이 씻고

2. 들기름에 볶는다

3. 그 다음에 맛소금과 청양고추를 조금 뿌리면 끝!


닭똥집을 먹고 싶다는 페이스북 댓글을 보신 할머니가

직접 해먹으라고 알려주신 방법입니다 ^^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썻으면...”

 

할매집이 없어진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자 할머니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할매네가 경원플라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가게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 임대형식으로 자리를 빌려 할매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계약이 끝내기 전에 가게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매각해서 계약이 연장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당연히 재계약이 될 줄 알고 있던 할머니는 소리소문 없이 이루어진 가게 매각에 따라 경원프라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할머니는 다시 경원프라자로 돌아가고 싶지만 아마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경원플라자 2층 할매집)


가게를 절대 그만두지는 않아

 

할머니는 매일 저녁 10시만 되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복정동을 걸어 다닌다고 했다. 바로 다시 가게를 열 곳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경원플라자에 할매집이 없어진 다음부터 다시 가게를 열 공간을 찾고 있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임대료’. 할머니가 매일 돌아다니는 복정동도 경원플라자 보다 훨씬 비싼 임대료를 요구한다고 했다. 가천대역에 새로 생기는 건물에 들어갈려고도 했지만 월 1000만원이 넘어가는 임대료에 엄두조차 못내고 있는 상황.

하지만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절대 가게를 그만두지 않을것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할매에게 가게를 한다는 것은 돈을 번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학생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할매가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게 중요해,

나도 포기하지 않고 공부했다면 뭔가 해내겠지...

티비를 보면 몸이 아픈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다 이기고 그렇게 대단하게 됐잖아

현실에 실망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은 피곤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그걸 못 견디고 자살하는건 비굴한거고. 불구에도 굴하지 않고 사는게 중요하지.

젊은이는 절대 포기하면 안된다. 좌절은 할 수 있지만 자살은 비굴한 짓이야.

다시 시작해, 단지 조금 늦을 뿐이야.

나도 내가 참 바보였었다고 생각해. 죽고나면 실망도 절망도 없다.

정말로 죽고 싶으면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고 여행을 해.

그러면 눈에 띄는게 있을거야 그걸 잡고 살면 돼

열심히 살아 학생들 모두. 나는 그저 영원히 사랑할 뿐이야

 


우리가 할매라고 부르는 박경희 할머니와의 인터뷰는 3시간만에 끝이 났다

우리가 그 시간 동안 할머니로부터 가장 많이들은 말은 고맙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는 말도 함께. 



(항상 창문 앞에 서서 아는 학생이 있나 쳐다 보신다는 박경희 할머니)


할머니집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에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할머니

다시 할머니의 라면덮밥을 먹는 날이 돌아오기를 희망한다.